볼비는 거위가 태어나서 처음 본 물체에 각인된다는 로렌즈의 연구에 볼비는 애착이라는 개념이 <섬광처럼 갑자기> 떠올랐다고 한다. 자신의 정신분석학 연구에 동물행동학을 접목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볼비가 정신분석학을 현대화하는데 꼭 필요하다고 믿었던 과학적 발판을 만들어 주었다.
볼비는 정신분석학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동물행동학적 연구방법이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데이터를 근거로 이론적인 사상을 뒷받침한다는 것을 알았다.
볼비는 애착 세미나를 정기적으로 진행하기도 했는데 이때 동물행동학자를 초청하기도 했었다. 그 후 캘리포니아 스탠퍼드의 행동과학 센터에서 1년간 일하면서 프로이트를 다시 읽고 아동 본성은 그 어머니와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비롯해서 획기적인 논문을 준비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 볼비는 정신분석 학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으며 1956년부터 1961년까지 도널드 위니캇과 함께 정신분석 학계의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부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그 후 연구위원회를 결성하고 의장도 맡았으며 여러 개의 위원회를 창설하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중에는 정신분석 수련이 끝없이 길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창설된 교육과정위원회도 있었다. 그의 활발한 조직 결성의 능력은 당시 그 사회의 큰 혜택을 주었다.
그러나 1957년 부터 1959년까지 제시된 그의 논문은 클라인 학파로부터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위니캇은 우호적이고 볼비의 사회적인 공헌에 대해서 공감했으나 "사실 볼비가 나의 글을 늘 양심적이고 공정하게 평했으나 나는 그의 논문이 일종의 심한 불쾌감을 주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라고 말했다.
볼비는 개구쟁이 같은데도 있었고 유머도 있었으며 장난기도 많았는데 정신분석 학자들은 그의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볼비는 학계의 일부 학자들의 적대적인 반응 그리고 학계 밖에서의 유명세로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정신분석학회에서 거의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학계의 적대적인 반응에서도 볼비는 사회에서 수많은 지위를 가졌고 자문가의 역할도 했다. 그리고 미국 심리학 회상을 비롯한 과학자 상과 훈장을 미국에서 받았다.
그는 1979년까지는 3부작 <애착>, <분리>, <상실> 저작에 힘썼으며 이 책들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는 계속해서 학생들을 격려하고 외국어서 오는 방문객을 맞이 했으며 강의 한 내용들은 그의 저서 <안전지대>에 수록되어 있다.
정신적 신체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그는 70대에 다윈의 <정신분석적 전기>라는 전혀 새로운 연구를 시작했고 이 글은 그가 죽기 전 몇 달 전에 출판되어 많은 호평을 받았다.
80세 생일에는 세계 각국의 저명 강연자들과 동료 친구들이 모여 화려한 생일 파티도 즐겼다. 그 후 1990년 스카이 섬에 있는 저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평소 자연을 좋아해서 묻히고 싶다고 했던 그곳에 묻혔다.
'교육 > 심리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포츠 심리학에서 바라 본 정서와 호르몬(옥시토신) 강의 후기 (0) | 2025.03.27 |
---|---|
그림책 심리치료 (0) | 2024.03.11 |
애착은 뇌 발달과 연결되어 있다. (0) | 2022.01.14 |
존 볼비 애착 이론의 배경과 이해 (0) | 2022.01.11 |
애착 이론의 창시자 < 존 볼비의 삶>, 첫 번째 (0) | 2022.01.07 |